동화나라의 달빛공주 4 만화,애니,라이트 노블

뭐 객관적으로 높이 평가할만한 부분이 딱히 없는 작품인 거야 새삼스럽게 다시 말할 필요도 없지만 내가 양산형 웹소설을 많이 안 봐서 그렇게 느껴지는 것인지는 몰라도 주인공을 띄우기 위해 주변의 지능을 낮추는 문제는 별로 안 느껴지는 것이 즐기기는 편했다.

2-3권의 용,엘프와 관련된 소재는 '무능한 주인공의 착각물'치고는 웃어넘기기가 힘든 부분이었기에 오히려 소소한 이야기는 그 부분보다는 좋았을지도 모르겠다.

아다치와 시마무라 4 만화,애니,라이트 노블

어쨌든 지금은 정발이 되고 있다는 사실 자체에 감사해야 하려나.

연애물로서는 굉장히 진도가 느린 작품이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아다치의 성장과정을 지켜보는 것이 즐거운지도 모르겠다.

1권과는 겉으로 보이는 아다치와 시마무라의 캐릭터가 이미 정 반대로 뒤집혔다는 건 이젠 농담거리도 못 되겠지만.

묘하게 삼각관계 떡밥을 투척하는 타루미나, 메인과는 별개로 커플링에 여념이 없는 히노와 나가후지의 모습도 신경쓰이는 부분.

전파녀와 청춘남 수준으로 메인 스토리와 연관되는 것도 아니라면 결국 맥거핀밖에 안 될 외계인 소재는 좀 줄여줬으면 좋겠지만 아마 무리려나.

게이머즈 6 만화,애니,라이트 노블

전개 자체는 순항중.

...10권이 넘어가면 잘 보던 작품도 매너리즘에 빠져 식는 경우가 요즘 꽤 있었지만 아직은 여유가 있고.

코우세이의 캐릭터는 조금 의외였다. 지금까지는 이렇게 정형화된 속성을 가진 캐릭터는 나오지 않았었는데.

하지만 라노벨부의 유키카가 싫지 않았던 것과 비교하면 코노하를 압도하는 싸가지없음은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정형화된 속성도 그렇고 싸가지도 그렇고 스토리 진행을 위해 투입된 신캐릭터치고는 마이너스 요소밖에 안 보이는데.

반면 2권에서의 인상이 영 아니었던 미스미의 활약은 의외로 인상적이었다. 생각해보니 카세나 오오이소와 어울리는 모습도 지금까지 거의 안 나왔었는데.

TVA는 작화가 불안한 느낌이라 스타트가 불안했는데 '무슨 이야기를 하는 작품'인지는 이해하고 있는 느낌이라 기대되기는 하는데...6권까지 보고 보니 대체 1쿨이라는 분량으로 어디까지 애니화가 될지는 영 감이 안 잡힌다. 4권까지는 들어갔으면 좋겠지만 각권 구성이 구성이라 어디에서 끊기에도 애매한 느낌이고.

FLOWERS 가을편 게임

입수는 그렇게 늦지 않았지만 그 시기에 바쁜 일이 많았는데다 오래된 PC가 본격적으로 상태가 나빠지기 시작한 결과 겨울편의 소식이 나오고서야 클리어, XP는 봄편 당시에도 공식적으로 미지원 OS였는데 그 이후로도 벌써 4년차니 이놈의 컴퓨터를 바꾸긴 해야겠는데.

사실 유즈리하의 가면은 이른바 갭 모에라는 것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고, 여름편이 문자 그대로 시원시원했던 것에 비하면 봄편의 스오우와 가을편의 유즈리하는 뭐랄까...답답하다는 느낌이 앞선다. 링고 루트를 진행하고 보니 차라리 화자가 링고였다면 적어도 개인적인 취향에는 훨씬 더 좋았을지도. 사실 제일 좋다고 생각한 엔딩이 쌍둥이였으니. 여름편은 결국 외전이었던 셈이지만 화자가 야에가키라는 것만으로도 분위기가 전혀 달라진다는 것이 신기하다.

메인 히로인인 네리네 쪽도 과거가 밝혀지기는 했는데 정작 죄의식, 우정, 그리고 종교적 신념이 애정으로 바뀌는 과정은 좀 디테일이 부족하다는 느낌이 앞선다. 트루보다는 차라리 링고나 네리네 엔딩이 정합성으로는 더 나았을지도. 봄편에선 스오우는 좀 답답했지만 마유리와 릿카의 포스가 압도적이라 그냥저냥 넘어갔는데 유즈리하와 네리네는 봄편부터 쌓아온 캐릭터가 있다 보니 봄편의 마유리처럼 넋을 잃고 미모와 목소리에 빠져드는 식이 되지는 않는 것 같고.

한편으로는 메인 스토리도 걱정, 여름편에서도 걱정이었는데 떡밥을 이렇게 많이 깔아놓고 사람이 안 죽는 이야기를 수습할 수 있으려나. 봄,여름,가을에 비해 소식이 늦어졌을 때는 걱정했지만 일단 발매일이 잡혔으니 뚜껑을 열어봐야 하겠는데.

유라 2좌의 전사기사 - 전훈을 받아들여, 맹훈련을! 따로 노는 말 번역

출처 항공자위대 OB 홈페이지 '츠바사 회'

'러일전쟁때의 장비는 일류, 다이쇼 시대엔 2류, 쇼와에 들어서서는 삼류'라는 말은 누가 했는지 몰라도 정확한 평가인 모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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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발백중의 포 1문은, 백발일중의 포 100문을 이긴다'란, 러일전쟁 종결 후 토고 헤이하치로 연합함대 사령장관이 연합함대 해산사에서 한 말이라고 합니다. 해산사라고 말했습니다만, 다이쇼 전반기까지 연합함대는 전시 등에 임시로 편성되는 것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러일전쟁이라는 전시가 종료된 것에 의해 해산되게 된 것입니다.
그 이후, 제1차 세계대전 후 워싱턴 군축조약에 의해 일본 해군은 당시 해군의 주전력이었던 전함 척수를 당시 가상적으로 상정하고 있던 미국 보유수의 6할로 억제되었습니다. 이 때문에 워싱턴 군축조약은 해군의 작전 구상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때까지 해군의 작전 구상은, 러일전쟁 때와 동일하게 일본 근해에 배치된 미국 함대를 조기에 공격 격파하고, 그 후 침공이 예상되는 미국 주력함대를 일본 근해에서 요격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전함의 보유수가 미국 해군의 6할이어서는, 이 요격작전의 최종단계에서 예상되는 함대결전에서 승산이 서지 않는다는 것이 당시 해군의 생각이었습니다.

이 생각은, 러일전쟁 당시 제2함대 참모로 그 이후 해군대학교 교장이 된 사토 테츠타로 중장의 연구에 기인합니다. 사토 중장은 과거의 전례를 조사해 방어측의 함대는 공세측의 함대에 비교해 열세라도, 그 병력이 상대의 7할 이상이라면 승리를 거둔 사례가 발견되지만, 7할을 밑돌면 그런 예가 없어진다는 연구결과를 도출했습니다. 사토 중장은, 그 저서 '제국 국방사론'이나 해군대학교 교관 시절의 수업에서 이 생각을 보급시켰기 때문에, 이 연구결과는 해군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이 때 이후로, 모두에 언급한 토고 사령장관의 말은 일본 해군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다고 전해집니다. 자군의 전함의 명중정밀도를 올려 백발백중으로 만들면, 수적으로는 우세하지만 명중정밀도는 뒤처지는 적 함대에 이길 수 있다는 의미가 붙게 되었습니다. 즉 전함 척수의 열세는, 훈련으로 보충하면 된다는 결론이 된 것입니다. 여기서 '월월화수목금금'이라는 휴일도 없이 맹훈련을 하는 일본해군의 전통이 시작되었습니다.

그 후 런던 군축조약에서 보조함의 보유수를 미국 대비 7할에 거의 근접하는 수치로 억제된 해군입니다만, 이 때는 조약의 승인 문제가 국회에서 '통수권 간범'문제(역주:군사는 덴노의 고유권한이므로 문민정부가 통제할 권한이 없다는 주장으로 시작된 밥그릇 싸움)로 발전해, 당시 수상이 총격사건을 당하기까지 이릅니다. 또한, 해군 내부에서도 이 문제에 기인해 조약파, 함대파라는 파벌이 발생해, 이후 해군 인사에 파문을 던지게 됩니다.
하지만, 러일전쟁시의 연합함대는, 러시아 태평양 함대와 황해해전을 벌일 당시 전함 척수비가 4:6으로 러시아 대비 7할에 못 미쳤고, 쓰시마 해전에서도 4:7 혹은 4:11로 역시 러시아 대비 7할을 채우지 못했습니다. 연재 제 7회는 '항공 병력≠항공 전력'이라는 부제였습니다만, '병력'은 단순한 숫자입니다. 하지만 '전력'은 단순한 숫자가 아니고, 여러 가지 구성요소가 복잡하게 영향을 미칩니다. 전사연구 등에서, 이들 '전력'을 구성하는 각종 요소를 분석해 수치화하면 굉장히 이해하기 쉬워지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 때, 그 구성요소의 가중치 계산에 실패한다면, 혹은 자의적으로 가중치를 계산한다면, 그 전사연구 결과 자체가 의심스러워지게 됩니다. 즉 '역사의 오용'이라고 할 수 있는 사태가 됩니다.
'백발백중의 포 1문은, 백발일중의 포 100문을 이긴다'라는 토고 헤이하치로 연합함대 사령장관의 말에서 여러 가지로 써 보았습니다. 이 말은, 나온 뒤 그 의도와는 관계없이 따로 놀아버린 예의 하나가 아닐까 느끼고 있습니다.



지난회, 연합함대 해산사에 포함된 말의 영향에 대해 거론했습니다. 그럼, 이 말이 나온 시점에서 토고 사령장관이 했던 이 말의 진의는 어디에 있었을까요. 어느 정도 추측이 가능하다고 생각됩니다.

쓰시마 해전에서 토고 헤이하치로 연합함대 사령장관은, 발틱 함대를 발견한 후, 이른바 '토고 턴'으로 불리는 대회두를 실행해, 발틱 함대와 병행해 항행하면서 그 진로를 가로막으며 포격전을 벌이는 태세로 몰아넣었습니다. 이 '토고 턴'이란, 어느 해양상의 한 점에서 일렬종대를 취한 일본 함대 주력이 한 척씩 순서대로 회두한다는 것입니다. 이 운동에 대해, 당시의 해군 내부나 후세 저술가들 사이에서도, 발틱 함대의 각 함이 이 선회점을 노리게 되면 선회중인 각 함은 일방적으로 포격을 당하게 될 뿐 반격할 수가 없는 극도로 위험한 상태라고 여겨져 왔습니다. 이 때문에, 이 운동을 실행한 토고 사령장관의 결단은 대모험이었다는 설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 통설을 정면으로 반박한 인물이 있습니다. 그게 누구인가 하면, 포술의 권위자였던 마유즈미 하루오 전 해군 대좌입니다. 마유즈미 전 대좌는, 그 저서 '해군 포전사담'(原書房, 1972년)에서 당시의 포술 기술과 러시아 함대의 포술능력을 감안하면, 적전에서 대회두를 해도 당시의 기술로는 통설처럼 선회점에 포화를 집중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 애초에 발틱 함대의 사격능력이 낮아 이 운동중에 큰 피해를 입힐 수 없다는 것을 증명했습니다.

또, 영국 오스프레이 사가 2001년 출판해 2010년에 대일본회화에서 번역출판된 로버트 포첵 저, 히라타 미츠오 역 '연합함대 vs 발틱 함대 일본해해전 1905'에 의하면, 상대와의 거리를 재는 측거의의 능력에서, 러시아와 일본은 현격한 차이가 있어, 그것이 양국 사격능력의 차이가 되었다고 적고 있습니다. 일본측의 측거의는 영국제 최신형이었던 1903년형 기계광학식 측거의로, 유효 측정거리 6,000~7,300m 정도였습니다. 그에 비해 러시아 측의 측거의는 광학식이 주력으로 그 유효 측정거리는 4,000m 정도에 불과했습니다.

중력이 작용하는 곳에서 대포를 쏴서 상대에게 명중시키기 위해서는, 상대와의 정확한 거리를 재는 것이 불가결합니다. 왜냐하면 지구에는 중력이 있습니다. 대포의 탄은 포구를 떠난 순간부터 이 중력의 영향을 받아, 지면으로 끌려갑니다. 이 중력의 영향을 상쇄하기 위해, 대포는 앙각을 걸어 목표의 조금 위 상방향으로 노리고 탄을 발사합니다. 간단히 말하면 야구에서 말하는 플라이를 쳐서 목표에 맞출 필요가 있습니다. 이 때 어느 정도 앙각을 거는가 하는 것은, 목표와의 거리에 의해 결정됩니다. 대포는 앙각에 맞춰 그 탄도가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포탄을 신속 정확하게 목표에 명중시키기 위해서는 목표까지의 정확한 거리가 필요불가결하게 됩니다. 일본 해군이 보유하고 있던 측거의는 최신식으로 정확도가 높았던 것입니다. 그만큼 명중정밀도는 올라가게 됩니다.

토고 사령장관을 시작으로 하는 연합함대 수뇌부는, 이들 측거능력을 포함한 러시아 해군의 사격능력을, 황해 해전에서의 경험이나 뤼순 요새 함락 후 뤼순에 있던 러시아 함을 노획한 것에 의해 파악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런 요인에서 합리적인 판단으로 모험이라고 여겨졌던 '토고 턴'을 실행에 옮겼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연합함대 해산사에서 나온 말은, 정신론 등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실전경험과 냉철한 현상 파악에서 도출된 것이 되지는 않을까요.

전술한 대로 일본 해군은, 러일전쟁 전 영국에서 최신형 1903년형 측거의를 수입해 왔습니다. 이것은 당시 영국과 맺고 있던 영일동맹의 산물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또한, 당시의 일본 해군 전함은 전부 영국제였습니다. 영국은 이런 전함 등에 탑재되어 있던 포공병기 등도 당시 최신 제품을 일본에 판매한 것으로 보입니다. 냉전이 한창이던 무렵 소비에트 연방이 존재했던 시대, 이 나라는 우호국을 중심으로 전 세계에 각종 병기를 수출했습니다만, 이들 수출용 병기는 자신들이 사용하는 동종 병기보다 다운그레이드된 물건이었습니다. 이것은 동맹국이라도 동일했습니다. 하지만 당시의 영국은 동맹관계를 중시해 일본에 그런 다운그레이드 병기를 수출하지는 않았던 모양입니다.

토고 사령장관이 남긴 말의 배후에는, 이렇듯 제대로 된 동맹관계에 의해 지탱되는 기술적 우위도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부분을 감안하면 토고 사령장관의 말에는 당초 정신적 요소는 없고, 극도로 합리적인 배경에 기반한 것이라고 상상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도와 배경에서 나온 말을 다른 의미로 받아들이게 되는 것은, 그 말이 나온 배경이 간단히 잊혀지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현재 우리들의 귀에 들어오는 경구로 남아있는 말도, 어쩌면 말한 본인의 의도와는 전혀 다르게 해석되고 있을지도 모르겠군요. 또한, 이것은 러일전쟁에서 기술적 우위나 동맹관계의 뒷받침에 의해 합리적으로 승리를 거둔 일본 해군이, 그 40년 후 이것들 대신 정신론을 전면에 내세워서 대전쟁을 수행하다가 패배한 것과 이어지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간부학교 전사연구실 유라 후지오

IJN의 독트린 일상 & 잡설

개인적으로 생각하는 야마토급 전함의 진짜 문제

러일전쟁 쓰시마 해전에서 도고 헤이하치로가 대박을 터트리면서 '함대결전으로 한타 싸움을 벌여 승리' 라는데 목을 매게 됩니다만, 애초에 이런 결론이 나온 이유가 제대로 된 강대국과 진짜 총력전,장기전,소모전을 할 국력이 없다는 데서 나온 것이었죠.

그래서 점감요격작전이라는 것이 짜여지기는 했는데...이건 어디까지나 진격해오는 침략자의 함대를 일본 근해까지 끌어들여서 요격하는 방어전략이었고 2차대전처럼 선빵을 날려 나와바리를 땅따먹기하는 상황에 대한 대비는 전혀 안 되어 있었던 겁니다. 연합함대 내부에서도 그나마 좀 머리가 있는 부류는(보통 그런 부류로 여겨지는 야마모토 이소로쿠는 보신주의에 철저했던 결과 대세를 따라 '우디르'한 뒤 진주만 공습을 들고 나왔습니다만)41년 말의 개전을 반대했다는 이야기가 있긴 합니다.

크릭스마리네가 그랬듯, IJN도 자신들이 상정하고 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상황에 내던져지면서 전쟁이 시작되었고 그러다 보니 삽질의 연속이 되었죠.

당시 제국주의 열강 중 최약체였던 제국주의 일본의 경제력으로 당시 세계 3위의 해군력 건설에 이어 야마토급 같은 거함을 만들 수 있었다는 것 자체가 '침략해오는 강대국의 해군력과 근해에서 결전을 벌인다'라는 목적에 우선순위를 둔 결과고, 정상적으로 해상 통상호위나 대잠, 보급역량을 균형적으로 갖추자면 IJN의 규모가 그렇게 확대될 수가 없는 게 당연합니다. 뭐 이거야 20세기 초부터 군국주의와 군부 밥그릇 싸움으로 달린 결과고 IJA도 숫자만 불리느라 장비면은 엉망이었지만.

일단 배경은 여기까지고, 그럼 전쟁이 시작된 와중에서 왜 이런 초전함을 아끼고 있었는가 하면...

높으신 분들이 전장에 안 가기 위해서


믿기 힘들겠지만 사실입니다. 아무래도 한국의 입장이 입장이다 보니 제국주의 일본에 대해서는 객관적인 평가는 어려운 면도 있고 한편으로는 일빠도 득시글거리는 게 현실이지만 문자 그대로 파도파도 문제만 나오는 게 파시스트 군국주의자의 현실입니다. 그나마 나치 독일은 반증연구가 좀 많이 나왔지만.

우선 연합함대라는 조직 자체가 함대결전을 위해 조직된 해군의 핵심조직이고, 전략상 여기에 힘이 실리면서 또한 밥그릇 싸움의 대상이 된 것이죠, 예시를 들자면 도고 헤이하치로 시절의 연합함대는 충무공이 삼도수군통제사로 있던 시절의 조선 수군이고, 2차대전기의 연합함대는 원균이 통제사로 있던 시기의 조선 수군이라고 보면 이해가 빠를까요...

가령 일본군 상층부 치고는 그나마 개념이 좀 박힌 인물로 알려진 개전 당시 연합함대 사령장관 야마모토 이소로쿠입니다만 전술 레벨에서는 진주만 이후 실책의 연속인데, 사실 이 사람은 개념인이나 멍청하다는 평가보다는 츠지 마사노부와 흡사하게 머리는 좋지만 그걸 자기 보신에만 쓰는 부류에 가깝지 않은가 하는 게 관련자료를 뒤져본 후의 생각입니다.

본격적으로 미국의 쇼미더머니 파워가 발휘되기 시작한 43년 이후로는 무슨 짓을 해도 승산이 없는 게 확실했지만, 진주만 공습으로 주력함 차이를 벌려놓은 것도 있어 42년 중에는 연합함대의 전력을 문자 그대로 함대결전을 위해 집결시키면 일본에 승산은 있었습니다.

그런데 정작 미드웨이에서도, 과달카날에서도 모아서 가는 게 아니라 근해 방어전을 위해 짜여진 점감요격작전의 계획대로 항공모함-구축함-잠수함-(전함)식의 축차투입을 합니다. 보통 적 제공권 하에 전함을 돌입시킬 수 없었다는 핑계가 이 주제에서 자주 보이는데 실상은 전혀 다릅니다. 제로센이나 일식육공이 맷집이 빈약하네 어쩌네 하는 문제를 다 감안하더라도 42년까지는 일단 미국에 비벼볼 수는 있는 항공력을 가지고 있었는데도, 결전이 아니라는 핑계로 딱가리들만 먼저 내보내 놓고, 그 딱가리들이 다 소모된 뒤로는 '제공권이 없으니 못가요'라면서 몸을 빼는 것이죠. 진짜 점감요격작전에서 상정한 대로 본토 방위전이었다면 그런 경우에도 본토 항공대의 지원이 있으니 괜찮지만, 공세를 펼치면서 그런 것은 당연히 불가능하고,

항모전력이 다 소모되고 난 후에 제공권이 없으니 주력함은 못가고 공고급이랑 중순양함으로 야습을 할 게 아니라, 류조가 새러토가를 몸빵하고 쇼카쿠가 엔터프라이즈와 드잡이질을 벌이고 있는 바로 그 때 야마토를 비롯한 주력함대를 돌입시켰어야 하는데 축차투입을 했으니.

물론 결전에 대비한 전력을 갖춘답시고 군수지원능력을 등한시한 당시 IJN의 사정상 쉬운 일은 아니었겠지만, 적어도 미드웨이에서는 투입된 포인트는 달랐지만 연합함대 전 전력을 동시 투입 가능했고, 과달카날 전역의(영화화된 '아부라가 나인다'가 유명하죠)사정도 실은 투입할 견적도 안 나오는 전함전력을 근 1년 반 정도 트럭 정박지에 전진배치시키면서 기름을 낭비한 결과(대략 아무것도 안하고 가만히 있어도 하루 중유 2천 톤, 작전활동이 있으면 하루 6천 톤 정도인데 그렇게 1년 반...)자초한 것일 뿐입니다.

오다 준이치(御田 俊一)라는 연구가는 '제국해군은 왜 패배했는가'라는 저서에서 IJN의 대함거포주의가 실패한 이유를 상층부가 겁먹고 몸을 사린 결과라고 단정하고 있습니다.
이 문제는 위험한 곳에는 절대 가지 않으려 했던 야마모토가 암호가 뚫려 미군에게 격추된 이후로도 여전했고, IJN이 남은 모든 여력을 모아 미군의 필리핀 상륙을 저지하려 했던 레이테 만 해전 한 달 전 연합함대 사령부는 사령부를 본토로 이동시키며 사실상 적전도주합니다, 이쯤 되면 거의 육군의 삼대오물 도미나가 교지에 필적하는 행각이죠, 자기네들만 본토로 도망쳐 놓고 함대에는 '미군과 동귀어진해라'라고 명령을 내려봤자 사기가 높을 리 없고, 그러다 보니 그 결과가 목표를 눈앞에 두고 거짓정보에 낚여(허위무전을 받았다고 하지만, 정황을 판단해 보면 단순히 개죽음하기 싫었을 가능성이 더 높습니다)돌아온 일명 구리다 턴이죠.

카시노키 미대의 기묘한 주민 1 만화,애니,라이트 노블

센서에 걸려 집어들기는 했는데...결론은 일상계 미스터리에 한해서는 통산 적중률 자체가 높지 않았다는 것만 실감하게 되었다. 적중례가 어린양과 고전부밖에 없으니.

이야기는 적당히 무난하게 클리셰를 따라가는 수준이지만, 오덕계 라이트노블의 '강렬한' 캐릭터 조형은 별로 취향이 아니었을 텐데도 대체 본작의 어디에 '캐릭터소설대상 대상'이란 걸 받을 건덕지가 있었는지 의아해지는 부분.

나가하라는 플라워즈의 스오우가 그랬듯 주인공을 먹기엔 너무 답답한 조형이고, 카지야는 그저 자의식 과잉, 타치바나는 공기, 그나마 비중은 공기수준이지만 캐릭터가 섰다고 할 수 있는 건 이세가타뿐인데.

미디어웍스 문고로 나온 물건도 아닌 것 같고 또 표지는 일반소설답지 않은 이런 어정쩡한 결과물을 대체 어떤 계층을 타겟으로 잡고 내놓은 걸까.

2차대전 중 일본해군 지휘관을 평가한다 번역

출처 역사와 인물 쇼와 56년 5월호
2차출처

존대와 반말이 섞여있는 건 원문부터 그렇다 보니 옮기는 입장에서는 애로사항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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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지는 내용

유라 2좌의 전사기사 - 상정 외 & 임기응변과 원칙 중시 번역

사실 이글루스에 번역한 블로거가 있지만, 비공개 상태이기에 편의상 다시 직접 번역.

출처 항공자위대 OB 홈페이지 '츠바사 회'
같이 보기 : 일본 방위성 전사연구연보 15호

상정 외

1. 쾌진격의 뒷면
지난 대전에서, 육해군은 그 서전기 놀랄만한 전과를 거두었습니다. 그 기세를 타고, 솔로몬, 뉴기니아 방면에까지 전선을 확대해 나갑니다.

종전 직후 작성된 육군 항공장교의 회상에, '연합국 측은, 과감하게 일본 측 항공병력의 행동권 밖까지 그 병력을 후퇴시켜, 그곳을 거점으로 반공의 기회를 노렸다'라는 의미의 기록이 있습니다. 연합국 측에서 보면, 일본 측의 항공병력 행동권 내에 머물러서 싸워도, 주도권을 확보한 일본 측이 우세하게 되어 그 주도하에 연속공격을 받게 됩니다. 그 결과 자신들의 손해가 증대되고 패배에 이르러, 상대에게 더욱 기세를 실어줄 수밖에 없게 됩니다. 그런 상황을 피하기 위해, 일본 측의 항공병력 행동권 밖까지 과감하게 후퇴해, 거기서 자군의 항공 기지 등의 항공 인프라를 구축하고, 거기에 더해 레이더 등의 조기경계망을 구축하고 고사화기도 배치해 방어를 굳혔다고 분석한 것입니다.

일본 측이 공격을 계속하기 위해서는 해당 전역을 항공병력 행동권에 포함시키기 위해 항공 기지를 추진하고, 항공 인프라를 정비해야만 합니다. 이 대전중, 일본 측의 항공기지 설영능력은 연합국 측에 크게 뒤처졌습니다, 또한 보급선도 늘어나게 되고 맙니다. 이에 비해 연합군 측은 오스트레일리아 등의 근거지가 가깝고, 또한 항공기기 설영 등 태세가 정비되어, 일본 측보다 유리한 입장에 서게 되었습니다. 말하자면 연합국 측은, 일본 측이 설정한 씨름판에서 싸우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유리한 씨름판에 일본 측을 끌어들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육군 항공장교의 회상에 이런 기술이 있는 것은, 육해군 모두 연합국측의 전략에 말려들어 상대가 상정한 전역이라고 할 수 있는 솔로몬, 뉴기니아(이하 남태평양 방면)에서 소모전을 치르며, 그 항공전력의 골간인 정예부대를 소모한 것에 대한 반성이 컸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또한, 육해군 모두 연합국 측의 반공작전에 대해 자신들이 고전한 경험을 살리지 못하고, 절대 국방권의 설정에 수고를 들이며 충분한 방위 태세를 갖출 틈도 없이 작전준비 등의 태세가 미완성인 채로 연합국 측의 침공을 요격할 수밖에 없었던 괴로운 경험이 배경에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덧붙이자면 이 회상을 남긴 것은 그 후 항공자위대 공막장 후보 중 한 사람으로 입대한 마츠마에 미소오 전 항공총대 사령관입니다.



2. '상정 외'
육해군에게 있어 그 항공전력의 골간을 잃어버린 남태평양 방면의 전투는, 당초 해군이 담당하고 있었습니다. 기본적으로 대 미국전은 해군 담당이었습니다. 이 시기까지의 해군항공은, 치열하지만 며칠 내로 종료되는 해전이라면 모를까, 자신들에 필적하는 강력한 항공전력과, 수 개월에 걸쳐 연일 대량의 항공기가 반복해 전투를 벌인다는 '항공 대치전'이라는 전투 형태를 경험한 적이 없었습니다.

이 때문에, 해군항공은 치열하지만 며칠 내로 종료되는 해전을 벌이기 위한, 즉 함대결전을 위한 전력이며, 장기간 지속적으로 전투를 한다는 상황에 적응하는 것이 곤란했습니다. 그런 해군항공에게 있어, 남태평양 방면의 싸움은 '항공 대치전'이라는, 문자 그대로 '상정 밖의'상황이었습니다.

영화 '영원의 제로'나 사카이 사부로 씨의 저작 '대공의 사무라이'에서도, 남태평양 방면 항공전에서 고전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습니다. 야마모토 이소로쿠 연합함대 사령장관이 이 방면에 '호랑이 새끼'(장중보옥이라는 의미, 이유는 후술합니다)라고 할 수 있는 항모 탑재 항공전력의 투입을 결정한 것도, 이런 상황이 발생했기 때문입니다. 이 시기까지의 해군항공은 전술한 대로 함대결전을 위한 전력이며, '영국 본토 항공전 : Battle of Britain'같은 '항공 대치전'을 벌일 수 있는 '공군'적인 요소가 적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역경 속에서, 해군은 육군에 대해 그 항공전력 파견을 요청합니다. 육군항공은 해군항공과는 달리, '할힌골 전투'에서 당시의 가상적이었던 소련군과 수 개월에 걸친 '항공 대치전'을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그 큰 소모에 경악해, 전투능력을 장기간 유지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고 어려운 일인지를 실감했습니다. 그리고 그에 대한 대책도 세웠습니다. 그에 따라 보급 등 각종 항공 인프라를 정비하고 훈련도 주도면밀하게 실천해 전력 발휘에 만전을 기해 왔습니다. 이 때문에, 그런 항공 인프라도 갖추어지지 않은, 준비를 할 여유가 없는 남태평양 방면에 대한 항공전력 파견은 문자 그대로 '상정 외'였던 것입니다.


3. '항공 병력'≠'항공 전력'
해군항공은, 함대결전에 기여하기 위한 전력입니다만 그 행동 공역은 해상입니다. 이 때문에 아무런 목표도 없는 해상을 비행으로 이동해 목표를 발견하고, 무사히 기지에 귀환할 수 있는 항법능력도 제대로 익히고 있습니다. 앞서 '호랑이 새끼'라고 칭한 항모 탑재 비행대원은, 그 자체가 이동하는 항모에서 발진해, 적을 발견 공격하고, 이동하는 항모로 돌아와야만 합니다. 그만큼 숙련된 요원을 요구하게 됩니다. 즉 비장의 정예병력이기 때문에 '호랑이 새끼'인 것입니다.

그에 비해 육군항공은 육지 위를 비행하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어, 해군항공같은 해상 비행이 가능한 고도의 항법능력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남태평양 방면의 항공전에서는 해상 비행이 요구될 수밖에 없습니다. 육군항공 내부에서는, 해군의 남태평양 방면 파견 요청에 대해 맹렬한 반발이 일어났습니다.
분명히 인원, 장비품 등의 '항공 병력'파견은 가능할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것이 '전력'을 발휘할 수 있을지 아닌지는 다른 차원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항공 전력'의 괴로운 점입니다. 충분한 항공 인프라와 그것을 지탱하는 후방 지원능력을 확보한 후, 해당 상황에 맞는 훈련을 쌓지 못하면 '항공 병력'은 '전력'을 발휘할 수 없습니다.

항모 기동부대는 이동 항공기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현대에도 세계에서 문제가 발생했을 때 미국 대통령의 첫 마디는 '가장 가까운 항모 기동부대는 어디인가'라는 소문이 있을 정도로 긴급 전개능력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 항모 기동부대조차 탑재 연료 탄약 등의 제약이 있어 며칠간이라면 모를까 지속적으로 '항공 전력'을 발휘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이 때문에, 지속적 전력 발휘를 위해서는 사이판 섬 공략 등의 반공작전시에 미 해군이 실행한 것처럼 대규모의 후방 지원부대가 필요합니다. 그런 의미에서는 항모 기동부대도 동일한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결국, 이 방면의 전국이 어려워졌기 때문에, 육군 항공 내부의 반발을 억누르고 항법 교육을 담당하던 교도부대를 기간으로 한 이른바 정예부대를 남방에 파견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비행장 설영 능력이 낮기 때문에, '항공 병력'을 받아들일 수 있는 비행장의 숫자는 적었고, 그 적은 비행장에 '병력'을 집중시킬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상황은 연합국 측에 탐지되어, 비행장에 머무르고 있을 때 항공공격을 받습니다. 연합국 측과 달리 조기경계망의 능력에도 문제가 있어, 이 공격은 기습이 되었습니다. 이 때문에, 서전에서 큰 피해를 내고 맙니다. 결국 안 그래도 열세인 '전력'이 단숨에 저하되고, 상황은 더욱 악화 일로를 걸었습니다. 그 후로도 '상정 외'의 전장에서 고전은 계속되었습니다.


임기응변과 원칙 중시


1. 명백해진 전훈
남태평양 방면에서의 싸움은, 육해군 항공병력에게 있어 대 소모전이 되고, 그 전력의 골간이 박살났다고 할 수 있는 싸움이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호유'(鵬友, 항공자위대 부내 기관지 - 역주)헤이세이 26년 3월호의 토베 료이치 국제 일본문화 연구센터 교수(당시)의 논문에 의하면, 쇼와 덴노가 지난 대전에서 승산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1943년 8월이었다고 합니다. 이 시기는 남태평양 방면에서 치열한 싸움이 반복되던 시기입니다. 즉 남태평양 방면에서의 싸움은 쇼와 덴노에게 충격을 줄 정도로 일본에게 큰 영향을 준 것입니다.

이 일련의 싸움을 현장에서 경험한 육해군 항공부대는, 쌍방이 비슷한 보고를 올리게 됩니다. 그것은 강력한 연합군 항공전력에 대해 당시 육해군이 보유하고 있던 쌍발 폭격기(해군의 1식 육상공격기를 포함합니다)는 무력하며, 유력한 전투기의 호위 없이는 행동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해군이 올린 보고에서는, 쌍발 폭격기의 승무원 숙련도를 올리기에는 복수의 승무원의 연대 동작에 숙련될 필요가 있어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지만, 단좌 전투기에는 그런 요소가 적어 탑승원은 1년 정도면 충분한 숙련도에 도달한다는 내용도 있었습니다. 육군이 올린 보고에는, 연합국 측의 방공 시스템 앞에서는 폭격기의 야간 행동조차 제약된다는 것도 있었습니다. 즉, 남태평양 방면에서의 싸움이, 지금까지 육해군 항공이 그 운용의 기반으로 삼고 있었던 폭격 전력을 중심으로 한 항공 격멸전에 큰 의문이 던져진 상황이 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에 대해, 육해군은 어떤 대응을 취했을까요, 이 전훈을 받아들일지는, 조직의 골간에 관련된 중요한 문제이기에, 항공 운용의 지침이나 교범류에 이르는 큰 문제가 될 것은 짐작이 가능합니다. 또한, 그 상황이 이후의 전황을 좌우한다고도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2. 해군의 대응
해군은, 1944년 2월 말 전함으로 이루어진 종래의 결전부대 제1함대를 해산시킵니다. 그리고, 1)그 전함부대를 포함한 수상함 주체의 제 2함대와, 항모부대를 기간으로 한 제 3함대로 제1기동함대를 편성해, 그 사령장관은 제 3함대 사령장관이 겸임합니다. 즉 해군은 전함주병주의에서 결별을 시도해, 항공주병주의로 이행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그 항공부대도, 2)미드웨이 해전 이후의 항공부대 재건 시에 항모 탑재 항공부대에서 보다 양성이 용이한 육상 배치 항공대로 그 역점을 옮깁니다. 더해 1944년 3월에 3)지상기지와 항공기 부대 사이의 연계를 느슨하게 하는 특설 해군항공대 제도를 채용합니다. 종래의 해군에서는 항모 혹은 그 기지 고유의 항공대였던 것을, 항모, 기지와 항공대를 분리하는 편제를 취한 것입니다, 이것만을 보면 상당히 큰 변화로 보입니다.

하지만, 이들 변화는 3)의 조치 이외에는 미드웨이 해전의 전훈 반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적 지상군의 침공을 받지 않는 한, 항공 대치전에서 소모가 심한 것은 항공기 부대입니다. 그에 비해 정비보급 관련 부대는 그만큼 피해가 크지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또한, 항공기 부대는 쉽게 이동할 수 있습니다. 그에 비해 정비보급 관련 부대는 그렇게 간단히 이동할 수는 없습니다. 이 때문에, 지상부대와 항공기 부대의 연계는 느슨한 편, 즉 각각 독립되는 쪽이 소모전에 대응하기 쉽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들 변화는 쌍발 폭격기의 유효성이 감소했다는 전훈에 대해서는 답을 대지 못한 상황이었습니다. 해군이 지난 대전의 패인을 고찰하기 위해 종전 직후인 1945년 9월에 정리한 '대동아전쟁 전훈 조사위원회'의 문서 중 해군항공본부 담당 문서 중에는, '전투기 제일주의는 조기부터 제창되어 왔지만, 실제로 생산의 중심이 전투기로 이동한 것은 1945년 초두 이래'라는 취지의 기술이 있었습니다. 여기서 짐작할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개전 후 채용된 폭격기, 공격기의 많은 생산수와 비교해, 똑같이 개전 후에 채용된 전투기의 적은 생산수입니다.


3. 해군의 생각
개전 후, 해군은 함상공격기(뇌격기)'텐잔'. 함상폭격기(급강하폭격기)'스이세이', 육상폭격기 '긴가' 를 차례차례 채용합니다. 이들 기종은 전전에 개발된 기종보다 고출력 엔진을 탑재해, 종래 기종보다 성능은 향상되었습니다. '스이세이'의 엔진은 1,200마력입니다만, 다른 기종과는 달리 공기저항이 적어지는 수냉식을 탑재했습니다. 그만큼 같은 출력의 공냉엔진 탑재기보다 제성능이 높아집니다. 게다가, 이들 기체는 전부 천 기 단위로 생산되었습니다. 전훈에서 문제시된 쌍발 폭격기인 '긴가'도 동일합니다. 또한 전쟁 전반부 대활약한 1식 육상공격기도 대폭 개조되어 종전시까지 사용됩니다. 이 때문에 1식 육상공격기는 생산기 약 2,200기로 일본 쌍발기 최대의 생산량을 자랑합니다.

그에 비해 해군이 개전 후 채용한 전투기는 주요 기종으로 '시덴',' 라이덴','시덴 카이'를 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들 기체는 제로센의 2배인 2,000마력의 엔진을 가지고 있습니다만, '시덴'이 약 천 기 생산된 이외에는 400기 전후밖에 생산되지 않았습니다.

이에 비해, 육군이 개전 후 채용한 단발, 쌍발 폭격기는 2,000마력급 엔진 쌍발 4식 중폭격기 '히류'밖에 없습니다. 그것도 그 생산수는 600기 전후였습니다. 그런 한편 1식 전투기 '하야부사'이래 매년 신형 전투기를 채용해, 그 생산기수도 키100(5식 전투기)이외는 한 기종이 천 기 이상입니다. 그 엔진도 전술한 공기저항이 적은 수냉엔진을 탑재한 3식 전투기 '히엔'을 제외하면 1,500마력에서 2,000마력의 공냉엔진입니다. 특히 남태평양 방면에서의 격전을 겪고 채용된 2,000마력 엔진을 탑재한 4식 전투기 '하야테'에 이르러서는 3,500기 이상이라는 일본 역대 제 3위의 생산수를 자랑합니다. 덧붙이자면 1위는 제로센의 약 10,500기, 2위는 '하야부사'의 약 5,750기입니다. 게다가 제로센과 '하야부사'는 생산기간이 4~5년인 것에 비해, '하야테'의 생산기간은 1/4에서 1/5입니다.

덧붙이면 해군은 1940년의 제로센 채용 이래, 단좌 전투기를 12,300기, 육군은 1941년의 1식 전투기 채용 이래 약 13,700기를 생산합니다. 전술한 대로 해군이 생산한 단좌 전투기 중 1만기가 천마력급 엔진을 가진 제로센입니다. 육군이 생산한 단좌 전투기 중 약 5,750기가 같은 천마력급 엔진을 가진 '하야부사', 약 3,000기가 1,200마력 수냉엔진을 가진 '히엔'입니다. 육군은 1,500마력에서 2,000마력의 엔진을 가진 전투기를 약 4,900기 생산한 것이 됩니다.

이런 사실은, '대동아전쟁 전훈 조사위원회'문서 가운데에서 해군항공본부 담당 문서의 증언을 뒷받침하는 것은 아닐까요. 일본은 그 공업기반이 구미에 비해 뒤처졌습니다. 그 열세는 고출력 엔진의 개발이나 그 양산에 가장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즉, 고성능 엔진은 일본의 항공전력에 극도로 중요한 자원이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 중요한 자원을 해군은, 남태평양 방면의 전훈을 굳이 무시하고 전투기가 아닌, 쌍발 폭격기 등의 공격 전력에 충당한 것입니다.


4. 육군의 대응
같은 전훈을 앞에 두고, 육군은 항공군비를 대확충하는 것과 함께, 그 성질을 발본적으로 변경합니다. 또한, '항공작전강요'나 '항공병조전'등의 운용에 대한 기본적 생각만이 아닌, 서전의 전훈을 받아들여 1943년에 작성된 전투대, 폭격대 등의 각 부대별 '운용교범(안)'을 재검토해, 1944년에는 남태평양 방면에서의 전훈을 받아들인 각 부대별 운용교범을 배포합니다. 말하자면 지금까지의 생각을 크게 변경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가운데 가장 큰 변화가 항공군비에 대한 생각입니다. 육군 수뇌는 종래까지의 지상군 절대라는 생각을 버리고, 지상부대를 줄여서까지 항공병력을 2.5배로 확충한다는 결정을 내렸습니다. 그와 함께 전투기, 폭격기 등의 항공부대 구성 비율을 변경할 것을 결정했습니다. 그때까지의 육군 항공에서는 전투부대, 폭격부대의 병력비가 거의 동일하거나, 다소 폭격부대가 많았습니다. 그것이 1943년 10월에는 전투기 : 폭격기 : 습격기 : 정찰기 : 수송기의 병력비가 56.4 : 8.4 : 7.7 : 12.8 : 15.4로 변경됩니다. 폭격기와 습격기는 기본적으로 같은 성격을 가지고 있기에, 전투기 : 폭격기의 비율이 3.5 : 1이 된 것입니다. 이것을 실현하기 위해 기존의 쌍발 경폭격기 부대를 해체하고, 그 요원을 전투기 부대에 충당하는 것까지 이루어졌습니다. 전술한 대로 '하야테'가 단기간에 약 3,500기나 생산된 것은 이 때의 결정에 의한 것이 크지 않은가 생각됩니다.


5. 결정의 뒷면
이런 의미에서는, 육군은 해군보다도 전훈을 신속하게 반영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배후에는 이 병력비의 변경이, 육군 항공 내부에서 초급간부 시절부터 항공요원으로서 근무해 온 중견 클래스의 큰 반대를 억누르고 실행되었다는 문제점이 있습니다. 이 경위는 전에도 인용한 적 있는 육군 항공 중견 분들이 종전 이후 집필한 '육군 항공 연혁사'에 자세히 쓰여 있습니다. 애초에, 지상부대를 삭감하면서까지 실행한 항공부대 확충은, 남태평양 방면 싸움에서 그 전략 단위인 1개 사단이, 해상 수송중에 연합국 항공전력의 기습공격에 의해 약 20분만에 그 전력을 상실했다는 경악할 만한 사태에서 기인했습니다. 육군 수뇌는 이 사실에 더해 그 후의 연합국과의 싸움 결과에서, 항공 우세를 유지하지 못하면 제대로 된 작전조차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항공 중시 및 전투기 초중점주의로 이행한다는 결정을 내렸습니다. 하지만 '항공병력을 극적으로 늘리는 대신, 우리들의 머리 위를 직접 지키는 전투기를 늘려라'라는 의미입니다. 이에 대해, 항공 출신의 중견 요원은, '극단적인 전투기 중점주의는, 항공전력의 큰 특징인 공격능력의 결여로 이어진다' 라고 반대 의견을 냈던 것입니다.

이에 비해, 1945년 초두까지 종래의 병력비를 유지한 해군의 상황입니다만, 전술한 '대동아전쟁 전훈 조사위원회' 해군 항공본부 담당 문서에는, '항공 출신 고급사관이 부족해, 어쩔 수 없이 타 직종의 사관을 그쪽에 배치해 충당했다. 하지만 그들은 항공전력이 무엇인가를 알지 못하고, 전문지식도 없고, 중견~신참이 제출한 계획을 그대로 승인했다.'라는 취지의 기술이 있습니다.

전황에 대응한 임기응변으로, 전투기에 전력의 중점을 둔 육군입니다만, 결과적으로는 유력한 연합군 항공전력 앞에는 통하지 않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단, 필리핀을 둘러싼 싸움 초진에서는 집단 사용된 전투기 부대가 연합국 항공전력과 호각의 싸움을 벌일 수 있었다고 합니다.

원칙을 중시해 공격전력을 중시한 해군입니다만, 통상 공격으로 항모 등 주력함을 격침시킨 사례는, 1944년 이후 1건 정도밖에 없습니다. 또한, 1944년 후반기 이후 항공공격의 주체는 특공(카미카제)이 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해군은 그 항공병력비의 변경을 1945년까지 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항공전력의 큰 특징인 공격능력의 유지를 도모했다고는 말할 수 있습니다.
남태평양 방면의 전훈이 명백해진 시점에서, 육해군 어느 쪽의 방침, 대응이 당시의 상황에 적응한 것일까요,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6. 정리 - 이렇게 생각해 보면 -
지난 회는, 선배들에게 질문을 던졌습니다. 질문을 던진 이상, 소생 나름대로 해답을 준비해야만 합니다. 독단과 편견으로 가득찬 소생의 답입니다. 지금까지의 연구, 학습 및 경험을 기초로 다음과 같이 정리해 봅니다.

이번의 기술과 상황으로는, 해군은 항공전력 운용의 원리원칙을 지켰다고 할 수 있습니다. 육군은 항공운용의 원리원칙을 제쳐두고 신속한 임기응변으로 전황에 대응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번 사례에서는, 신속한 임기응변으로 대응한 육군의 손을 들어줄 수 있지 않나 생각됩니다. 하지만 역사를 조사해 보면, 해군처럼 눈 앞의 이해에 사로잡히지 않고 원리원칙을 지킨 것으로 최종적인 승리를 얻은 사례도 많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생이 육군의 손을 들어주는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입니다.

해군은, 1944년 이후 침공해오는 미 함대와 수륙양용부대를 요격함에 있어. 함대의 주 전력인 기동부대의 항모, 특히 정규항모를 공격 목표로 삼는 것을 고집했습니다. 그에 비해 육군은, 해병대나 육군 병사를 수송하는 수송선을 공격목표로 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당시 미 기동부대의 방공능력으로는 그 방공망을 돌파해 방공망의 중심에 위치하는 항모를 공격하는 것은 곤란합니다. 또한, 미 기동부대의 내습은 해병대, 육군의 육상 병력과 함께 그 작전 목적인 요지(구체적으로는 도서지역)을 공략하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하지만 기동부대와는 달리 수송선단의 직접호위는 정규항모와 비교해 소형인 호위항모 등의 비교적 취약한 전력이 담당하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엄중히 방어된 기동부대의 정규항모보다 공격 성공 가능성이 높습니다. 또한, 육상 전력에 큰 피해가 나오거나, 상륙한 육상 전력에 대한 보급을 유지하지 못하게 되면 요지 점령 목적은 달성 불가능합니다. 적의 작전 목적을 저지한다는 의미로 보면, 육군의 견해가 목적에 적응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에 비해, 해군은 '적 함대의 주력을 격파하면, 그 재건에 시간이 걸려 전쟁 지속이 곤란해진다. 그러니 적의 주력을 공격한다'라는 생각을 러일전쟁의 승리로 굳히게 되었습니다. 그 가상적이 미국으로 바뀐 이후에도, 이 생각은 유지됩니다. 이 점에서 보아 해군은 자신들이 생각하는 주적을 격멸한다는 것에 총력을 기울인 것이 됩니다. 또한, 진주만 공격까지는 그 주적은 전함이었지만, 미드웨이 해전 이후 그 주적은 항모가 됩니다. 전쟁의 양상이 변화했는데도 불구하고, 종래의 발상이 거의 고정관념화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해군이 항공운용의 원리원칙을 지킨 것은 어떤 의미로는 종래의 관념에 사로잡힌 것에 불과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한편 육군에서는, 육군항공의 중견 클래스 즉 전문가의 반대를 억누르면서까지, 전투기 초중점주의로 이행했습니다. '현재의 우리 나라의 기술력에 기반하는 전력으로는 연합국군에 대항할 수 없다. 연합국보다 질, 양 모두 열세인 전력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 조금이라도 불리점을 개선하려면 어떻게 하면 좋은가' 라는 판단을 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 결과 '지상군을 줄여서라도 항공부대를 확충한다, 그 가운데 지금까지의 전훈을 반영해, 요원 양성이나 기재 생산이 비교적 용이하고 전장 상공의 항공우세를 획득할 수 있는 가능성이 높은 전투기에 중점을 둔다.'라는 결론에 이르렀다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이 사례만으로 이런 답을 내는 것은 난폭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소생도 수많은 선배들의 지도를 받아왔습니다만, 상정 외라고 할 수 있는 문제가 발생한 경우, 원리원칙을 고집하는 것이 아닌, 그 문제가 놓인 레벨의 상위 레벨의 관점으로 되돌아가 판단하라는 지도를 자주 받았습니다. 즉 육군은 적어도 해군보다는 선배님들의 생각에 가까웠을 지도 모릅니다.

조금 의미가 다를지도 모르겠습니다만, 니시우라 스스무 방위연구소 초대 전사실장이 쓴 '병학 입문 - 병학 연구서설'(다나카 서점, 1967년)의 191항에서 인용문을 소개합니다.

몰트케 문하의 수재로서 병학계에 이름을 떨치고 실전에서도 영명을 떨친 베르디 드 베르노와 장군이 1866년 나호드 전장의 종대 지휘관으로서 초진의 감상을 그의 '수병술'에 기록해, 이후 누차 인용되어 왔다.
즉 그는 눈 앞에 나타는 수많은 곤란에 직면해, 이에 대처하기 위해 과거의 범례 및 교훈도 자신의 기억 속에서 찾았지만 아무것도 얻을 수 없었다.
"전사도 원칙도 현장에서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 결국 어떻게 하면 좋은 것인가."
결국 그는 스스로 이에 대처할 방책을 내놓았다. '대체 문제가 요구하는 것은 무엇인가.'
De quoi S' agit-il? 즉 이것에 대처하는 자기 자신의 능력, 이것이 요구되는 능력이다."

이 문장에는 '전사도 원칙도 현장에서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 결국 어떻게 하면 좋은 것인가'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 전후의 문맥을 소생 나름대로 해석하면, 이 문장이 의미하는 것은 전사나 원칙이 무의미하다는 것이 아닌 그것들의 지식을 제대로 머리에 넣은 다음, 자기 나름대로 생각해야만 한다는 것이 됩니다. 바꾸어 말하면 자기 나름대로의 생각을 할 수 있을 정도로는 전사나 원칙을 이해해 두어야만 한다는 것이 됩니다. 과거의 사례인 전사, 거기에서 도출된 원칙의 의미를 음미하고,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만든 다음에야 처음으로 '대체 문제가 요구하는 것은 무엇인가'에 대한 답을 낼 수 있는 것입니다. 즉, 눈 앞에서 일어나는 일의 본질을 도출해낼 수 있는, 바꾸어 말하면 상위 레벨의 판단이 가능한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이 능력을 갖추는 것이, 전사를 배우는 의의 중 하나입니다. 역사는 반복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같은 인간이 벌이는 일인 탓에, 그 근저에 숨겨진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고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것을 염두에 두고, 그것들에서 어떻게 교훈을 만들어 내는가의 과정을 배우는 것이 중요합니다. 같은 사례는 발생하지 않습니다만, 대처법을 만들어내는 생각은 기본적으로 같은 경우가 많습니다. '그것은 과거의 일 아닌가'라는 질문은 소생도 젊은 시절 자주 들어왔습니다. 이것은 '전사=학교에서 배운 암기과목'이라는 생각에 기반한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하지만, 전사연구의 본질은 어째서 이런 사례에 이르렀는가라는 과정을 추구하고, 그 특징이나 문제점, 개선점을 자기 나름대로 고찰하는 것에 있습니다. 이런 과정을 밟아, 주어진 문제점, 아직 경험하지 못한 문제점에 대해 그 문제점의 하나, 둘 위의 레벨까지 시점을 넓혀 문제 해결에 힘쓸 수 있지 않은가 생각합니다.

마지막에 전사 선전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번회는 수업을 하는 듯한 내용이 되었습니다. 소생의 부덕의 소치입니다. 다음회는 좀 더 편히 읽을 수 있는 내용으로 찾아뵈려 합니다.

간부학교 전사연구실 유라 후지오

유라 2좌의 전사기사 - 2차대전기의 항공엔진에 대해 번역

최근 우연히 정보를 입수한 관심분야.
구 일본군으로 밀덕질을 하다 보면 소위 '일빠'가 자주 보이지만, 사실 공신력 있는 자료에서는 일빠들의 주장과는 정 반대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실상...

출처 항공자위대 OB 홈페이지 '츠바사 회'


여러분, 건강하십니까. 영화 '영원의 제로'가 공개되었습니다. 또한 제로센이라고 하면 작년 애니메이션 영화 '바람이 분다'도 공개되었습니다. 전자는 제로센에 타고 싸웠던 분들, 후자는 개발자에 초점을 맞춘 제로센 개발 전사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제로센은, 말할 것도 없이 1940년 등장 이래 종전까지 싸워나간 일본을 대표하는 전투기입니다.

마찬가지로 제 2차 세계대전 전 기간을 싸워나간 전투기는, 영국의 스핏파이어와 독일의 Me109 정도입니다. 양자 모두 제로센보다 첫 비행은 빨랐습니다.

제로센과 이들 유럽 전투기의 차이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엔진의 성능입니다. 유럽 전투기는 엔진 출력이 초기형과 후기형에서 2배 차이가 납니다. 스핏파이어는 출력 1,000마력이 2,000마력으로 향상되었고, Me109는 당초 700마력 엔진이 최대 양산형은 1,500마력, 후기형이 되면 2,000마력 엔진으로 교체되어 활약했습니다.

제로센은 전쟁 말기의 시작형이 1,500마력 엔진을 탑재했지만, 기본적으로 21형까지의 사카에 12형 엔진의 940마력이 32형 이후의 사카에 21형 엔진으로 1,130마력이 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 엔진 출력의 문제는, 제로센의 후계기인 17시(試)함상전투기(후의 렛푸)에서도 재연됩니다. 렛푸는 해군에서 제로센과 동등한 격투성능을 요구받고, 또한 개발자측이 추천하는 엔진보다도 저마력의 엔진을 채용하게 되었습니다. 이 때문에 익면하중을 낮추기 위해 대형화되고, 엔진 출력 저하도 맞물려 요구성능을 내지 못하고 개발에 난항을 겪습니다. 개발자측이 주장한 엔진을 탑재한 기체가 완성된 것이 1944년 10월로, 그 기체는 성능이 크게 향상되어 채용되게 됩니다. 제로센이 후반부 고전한 것은, 제로센의 성공을 잊지 못하고, 전투 양상의 변화에서 눈을 돌리고, 신형 전투기를 전장에 보내지 못한 해군의 실수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같은 시기의 육군이, 3식 전투기, 4식 전투기로 엔진 출력을 향상시킨 전투기를 채용해 실전에 대규모로 투입한 것과 비교해 보면 어떨까요.


지난번, 제로센에 1,500마력 엔진을 장착한 시작기가 있다고 적었습니다. 이번에는 그에 이어, 엔진과 기체에 대해 써 보겠습니다. 제로센에 탑재된 1,500마력 엔진은 킨세이 62형이라고 불렸습니다. 이 엔진은 전 대전 후반기 상당한 숫자의 기체에 채용되었습니다.

여러분, 수냉엔진을 장착했던 일본 육해군기가 있는 것을 알고 계십니까. 육군의 3식 전투기 히엔과 해군의 함상폭격기 스이세이입니다. 이 2종류의 기체는 대전 말기 공냉엔진으로 교체되어 그 신뢰성을 향상시켜 활약했습니다. 이 교체에 사용된 것이 킨세이 62형입니다. 기체는 각각 통칭 5식 전투기(키100)과 스이세이 33형으로 호칭되었습니다. 이렇게 쓰면, 질문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일본 육군과 해군은 사이가 나빴을 텐데, 어떻게 육군기와 해군기가 같은 엔진을 탑재할 수 있는가'하고.

육군과 해군은 그 생산 자원 배분 문제에서는 견원지간이었습니다만, 항공기의 엔진은 기본적으로 같은 것을 쓰고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제로센은 사카에 엔진을 탑재하고 있었습니다만, 육군의 동급 1식 전투기 하야부사도 기본적으로 같은 엔진이었습니다. 또한, 해군의 1식 육상공격기와 육군의 97식 중폭격기도 같은 엔진을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정확히는 같은 엔진에 다른 이름을 붙여 쓰고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해군 명칭 '사카에 12형'이 육군에서는 '하115'라고 불렸습니다.

또한, 킨세이 62형은 유명한 기체에도 사용되었습니다. 그것은 100식 사령부정찰기 3형입니다. 이 기체는 일본의 실용 군용기 중에서 최고 속도를 자랑하는 기체로, 기본적으로 속도성능을 중시했기 때문에 동체나 엔진을 탑재하는 너셀(nacelle)은 극력 가늘게 설계되었습니다. 2형까지의 탑재 엔진은 제로센의 시작기인 12시(試)함전에 탑재되었던 가느다란 즈이세이 엔진이었습니다. 이 즈이세이 엔진은, 전투기 등 소형기용으로 개발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능력 향상을 기대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에 육군은 마력은 높지만 그만큼 직경도 크고 공기저항도 커지는 킨세이 엔진의 탑재를 결단했습니다. 킨세이 엔진은 대형기용으로 개발된 엔진이었습니다. 가느다란 동체로 공기저항을 줄여왔던 설계진에게는 어떤 의미로 청천벽력이었다고 생각됩니다. 이 처치는 빛을 보아, 전술한 대로 3형은 일본 최고속도를 자랑하는 기체가 되었고 고고도 성능도 양호했다고 전해집니다. 이것은 100식 사령부정찰기가 장거리 강행정찰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 속도 성능에 중점을 둔 것이 가장 큰 요인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렇기에 다른 문제는 허용할 수 있었을 지도 모릅니다.

또한, 육군의 운용자들은, 운용중인 2형으로는 적의 전투기가 고속화되어 감에 따라 그 우위성을 언젠가 유지하지 못하게 된다는 것을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가느다란 엔진에서 보다 직경이 큰 엔진으로 교체하자는 이야기를 꺼내는 것에는 용기가 필요했습니다. 성공 체험을 버리고 새로운 도전을 한다는 것과 같은 의미니까요.


100식 사령부정찰기 3형의 개조 지시는 1942(쇼와 17)년 5월에 나와, 다음해에는 그 시험제작이 완료, 시험 결과는 양호해 실전에 투입되었습니다. 즉, 킨세이 62형은 1942년 초에는 실용화되었다는 의미가 됩니다.

어째서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가 하면, 제로센은 좀 더 이른 시기에 엔진 출력 향상이 가능했던 것은 아닌가 하는 의미에서입니다. 역사에 IF는 없다고 합니다만, 여러 가지 가능성을 검토하고 거기에서 문제점을 추출해 그것을 장래에 살리는 것은 역사를 되돌아보는 데 필요한 시점입니다. 단지, 여기서 아전인수가 지나치면 그야말로 역사에 IF는 금물이라는 이야기가 되겠지요.
군용기의 설계상, 가장 난관이 되는 것이 엔진입니다. 이 때문에, 시험기 제작 개시 시점에서 실용화된 엔진을 사용하는 것은 철칙입니다. 1942년 단계에서 제로센에 킨세이 62형을 탑재하는 것은, 이후의 같은 엔진을 탑재한 54형이 완성된 것으로 보아 가능하다고 생각됩니다. 1942년 단계에서 100식 사령부정찰기처럼 개조 지시가 내려졌다면...

이 경우의 문제점은, 킨세이 62형을 탑재한 제로센에 해군 자체가 흥미를 보이지 않았다는 가능성이었습니다. 미츠비시의 데이터에 의하면, 54형의 익면하중은 148Kg/m2로, 당시 주력기 21형의 익면하중 102~107Kg/m2와 비교해 상당히 무거웠고, 그만큼 운동성이 희생되었습니다. 제로센의 성공으로, 해군은 전투기의 격투성능에 과도하다고 할 수 있는 요구를 제시했습니다. 이 요구가 전술한 17시(試)함전, 후의 렛푸의 시험제작에 난항을 겪게 되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또한, 킨세이 엔진은 전술한 대로 대형기용이었다는 것도 난관이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하지만, 1944년 6월의 마리아나 해전에서 항모 기동부대가 괴멸적 상황이 된 이후, 제로센은 외양에는 개의치 않고 무장 강화에 분주했습니다. 당초의 무장은 20mm 기관포 2문, 7.7mm 기총 2문이었습니다만, 20mm 기관포는 초속의 향상, 장탄수의 증강을, 7.7mm 기관총은 13mm 기관총으로 추가 혹은 교체해 무장 강화가 이루어졌습니다.

미츠비시 관계자가 작성한 자료에 의하면, 1944년 7월 52형 병의 개발이 개시된 시점에서 격투전 중시에서 다총주의(20mm 기관포 2문, 13mm 기총 3문)으로 이행했다고 합니다. 이런 무장 강화에도 불구하고 엔진은 동일했기에, 그 성능은 저하되었습니다. 혹시, 1942년 단계에서 킨세이 62형으로 교체했다면, 이들 무장 강화에 따르는 중량 중가 문제를 해결할 수 있지는 않았을까요. 또한 격투전 중시에서 다총주의로의 이행에 따르는 성능 저하를 최소한으로 할 수 있지는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100식 사령부정찰기는 가능했고, 제로센에서는 불가능했던 것은, 그 기체를 운용하는 군에 미래를 내다보는 힘이 있었는지 아닌지, 종래의 성공 체험을 버릴 수 있었는지 아닌지의 차이에 있지 않을까요.


방위성 전사연구센터 국제분쟁사 연구실 소원 유라 후지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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